사진 신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진 신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아시아 여성들이 사진을 통해 결혼 상대를 선택하고 이주한 현상을 의미한다. 경제적 어려움, 사회문화적 요인, 이민 정책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으며, 일본, 한국 등지에서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중매인을 통해 사진과 정보를 교환하여 결혼을 결정하고,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언어 및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노동, 가정 불화 등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사진 신부 제도는 성비 불균형 해소에 기여했지만, 여성의 상품화, 허위 정보, 인권 침해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문화 작품으로는 소설, 영화 등이 있다.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는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남성과 여성이 사진을 교환하여 결혼하는 '사진 신부'라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났다.
2. 사진 신부의 출현 배경
1907년 신사협정은 일본인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을 제한했지만, 가족 초청 형식의 사진 신부 제도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15][16] 이 협정은 일본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중단시켰으나, 가족의 입국은 허용하여 많은 사진 신부들이 미국으로 이민할 수 있었다. 신사협정 이전 미국으로 입국한 일본인의 86.7%가 남성이었지만, 협정 이후에는 일본인 입국자의 41.6%만이 남성이었다.[17]
당시 일본과 조선 사회는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여성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해외 이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당시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과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도 사진 신부 현상을 부추긴 요인 중 하나였다.[6][7]
사진 신부 현상의 원천은 1908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신사협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협정은 일본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금지했으나 가족의 입국은 허용했다. 일본인 사진신부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한인들도 분명히 이 같은 제도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1885년, 사탕수수의 재배 및 제당업의 발전에 따라 일본과 하와이 왕국 간에 일본인 노동 이민에 관한 일포 이민 조약이 체결되어 하와이로의 이민이 정식으로 허가되었다. 이후 일본인의 하와이 이민은 1885년 2월부터 1894년 6월까지 동 조약에 의해 정부가 알선한 '''관약 이민''', 1894년 7월부터 1900년 6월까지 민간 기업의 알선으로 도항한 '''사약 이민''', 그 후 1908년 1월에 일반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계약에 의하지 않고 도항한 '''자유 도항 이민'''으로 나뉜다. 1898년에 미국이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하여 하와이 준주가 된 후, 1924년 7월 1일에 시행된 배일 이민법에 의해 일본으로부터의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재도항''' 및 '''가족 초청'''은 허가되었다[50] .
1885년 2월 8일에 주로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구마모토현, 오키나와현 출신의 943명의 첫 관약 이민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을 때 칼라카우아 왕이 직접 마중 나와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52] . 이후 하와이 일본인 이민자 수는 1888년 6,420명에서 1890년 12,360명, 1896년 24,407명으로 급증하여 1900년에는 61,111명에 달하여 하와이 인구(154,001명)의 약 40%를 차지하게 되었다[52] .
1908년의 이민 금지는 1907년 11월부터 1908년 2월까지 하야시 타다스 외무대신과 주일 미국 대사 간에 교환된 7통의 서한 및 각서에 의해 성립된 미일 신사 협정에 따른 것이며, 배일 운동의 격화에 대한 대응이었다[53] .
농업 노동자로 이주한 많은 일본인들은 원래 금의환향을 꿈꾸며 일정 기간 체류할 생각이었으나, 하루 50센트의 저임금으로는 재산을 축적할 수 없어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치" 의식이 강했던 당시 일본인 남성에게는 실패자로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52] 현지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정착·영주하는 것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 서부 해안으로 이주한 일본인도 많았지만, 일계 일세는 에 의해 시민권 취득 자격이 없었고, 이종 간의 결혼도 금지되었다[54] . 1908년부터 일반 이민이 금지되고, 부모나 처자의 초청만이 허가되면서 미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일계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사진 신부에 의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남성 447명에 여성 100명의 비율이었지만, '''초청 시대'''라고 불린 1911년부터 1919년까지 하와이로 도항한 사진 신부의 수는 9,500명[52][55], 미국에서는 1900년에 남성 24명에 여성 1명의 비율이었지만 사진 신부의 도미로 인해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여성 인구가 9,087명에서 38,303명으로 급증하여 남성 2명에 여성 1명의 비율이 되었다[56] .
2. 1. 경제적 요인
1907년 이후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며 결혼 문제를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진 결혼이 이루어졌는데, 신랑이 비용을 부담했다. 1910년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와 결혼한 조사라가 첫 사진 신부였다.[1] 1903년에서 1905년 사이, 여성 이민자는 10명 중 1명꼴로 남편과 함께 왔기 때문에 독신 남성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했다.[1] 1910년에서 1924년 사이, 약 600명에서 1,000명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하여 한인 남녀 성비 불균형을 해소했다.[1]
사진 신부 현상은 1908년 일본과 미국 간의 신사협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협정은 일본인 비자 발급을 제한했지만 가족 입국은 허용했다. 일본인 사진 신부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한인들도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1] 사진 결혼은 중매를 통해 사진을 교환하고, 합의 후 신부가 하와이로 와서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고국 방문 결혼보다 비용과 시간이 절약되는 편리한 대안이었다.[1] 조선과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중매결혼을 했기 때문에, 사진 신부 제도는 장거리 전통 결혼식으로 여겨졌다.[1]
사진 신부 제도의 정확한 시작과 첫 사진 신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민찬호 목사가 1909년에 처음 소개했다는 설,[1] 의주의 백예수가 사라 최를 이내수에게 중매했다는 설,[1] 백예수가 명선을 백만국에게 중매했다는 설,[1] 서울과 중부 지방에서 차공삼이 신부 사진을 보냈다는 설 등이 있다.[1]
대부분의 사진 신부들은 조선 남부의 항구 도시인 부산, 대구, 마산 출신이었다.[1] 이들은 하와이 노동자들의 고국 친척들이 보낸 경우가 많았다. 경상도 출신이 많은 이유는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한 토지 수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 당시 조선은 산업화되지 않아 땅을 잃은 사람들은 나라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많은 한인 남성 실업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호황을 누리던 일본으로 갔고, 여성들은 하와이로 가는 기회를 잡았다.[1]
사진 신부 제도는 신랑, 신부, 중매쟁이,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농장주들은 한인 남자들을 농장에 정착시키고 안정된 노동자로 만들고자 사진 신부를 권장했다는 오해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권장한 증거는 없다.[1] 오히려 사진 신부의 도착은 한인들의 도시 이동을 가속화했다.[1] 하와이 농장주 조합은 1912년에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융자를 제공하여 신부감을 데려오는 것을 거절했다.[1]
사진 신부 제도는 하와이 한인 남성들에게 가정생활의 희망을 제공했다.[1] 1905년 한인 이민이 끝난 지 5년 만에 시작된 이 제도는 한인들이 일시 체류자에서 정착민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했다. 1910년 조선의 독립이 끝나고 사진 신부 제도가 시작되면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은 극소수였다.[1]
사진 신부들의 특징과 동기는 하와이의 신랑 후보들과 비슷했다. 가난을 피해 하와이의 부에 매력을 느꼈고, 많은 여성들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었다.[1] 대부분 17세에서 24세 사이였지만, 15세나 40세도 있었다.[1]
남자들은 대부분 도시 출신이었고 한반도 여러 곳에서 왔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경상도 출신이었다.[1]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무학(無學)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전통에 따라 여자는 정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 한 자료에 따르면, 49명의 사진 신부 중 14명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22명은 1~3년, 8명은 4~6년, 4명은 7~9년, 1명만이 10~12년의 교육을 받았다.[1]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해방된' 여성으로, 교사, 간호사, 교회에서 일했다.[1]
사진 신부들은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하와이로 왔다. 일부는 기독교와의 인연,[1] 혼자 해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1]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목적,[1] 높아진 기대를 충족하고 전통적인 인습을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하는 열망,[1] 고등 교육 기회 획득,[1] 유교적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1] 등이 있었다.
사진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1] 유교적 전통에서 장손은 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많은 사진 신부들이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큰 부담은 아니었다.[1] 사진 신부 제도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은 가문의 명예와 관련이 있었다.[1]
중매쟁이들은 사진 신부 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이들은 사진 교환, 결혼 준비금, 여권 및 비자 신청 등을 주선했다.[1] 신랑의 사진은 속임수가 많았는데, 남자들은 나이가 많고, 농장 노동으로 늙어 보였으며, 흰 얼굴을 선호하는 처녀들에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은 매력적이지 않았다.[1] 남자들은 양복을 빌려 입거나, 남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수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결점을 숨겼다.[1]
결혼 합의 후, 신랑감은 결혼 준비금(최소 100달러 이상, 실제로는 300~400달러)을 지불해야 했다.[1] 이 돈은 신부의 여비, 중매쟁이 소개비, 사진값 등을 포함했다. 중매쟁이들의 사기, 신부감들의 변심 우려, 더 예쁜 신부감을 얻기 위한 뇌물 등으로 인해 비용이 높아졌다.[1]
사진 신부들은 요코하마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호놀룰루 이민 검역소에서 영어 읽기 및 쓰기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1] 이들은 사진 한 장과 이름만으로 신랑들을 만나야 했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1]
많은 사진 신부들은 젊고 돈 많은 신랑감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가난하고 늙은 남자들이었다.[1] 이들은 실망했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돈도 없고 체면도 서지 않아 결혼을 선택했다.[1]
새로운 생활 조건과 경제 사정, 특히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힘든 노동은 사진 신부들에게 큰 어려움이었다.[1] 숙소는 열악했고, 남편들은 그들도 일하기를 원했다.[1] 이러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에 남아 생활에 적응했다.[1]
대부분의 부부들은 새로운 생활과 노동 조건으로 인해 남녀 평등성을 갖게 되었다.[1] 도시로 이사 간 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1]
사진 신부들은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1] 재혼 기회는 많았지만, 힘든 삶은 계속되었다.[1]
사진 신부들의 하와이 도착(1910년~1924년)은 한인 사회의 중요한 이정표였다.[1] 이들은 남녀 성 비율을 정상화했고, 2세들의 등장으로 미국 가치관 수용을 가속화했다.[1] 또한,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에서의 대한 독립운동을 크게 진작시켰다.[1]
1924년 미국 이민법 통과로 사진 신부들의 입국은 끝났다.[1]
2. 2. 사회문화적 요인
당시 일본과 조선 사회는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여성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해외 이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당시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과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상도 사진 신부 현상을 부추긴 요인 중 하나였다.[6],[7]
몇몇 여성들은 가족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사진 신부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이나 조선을 떠남으로써 전통적인 결혼과 함께 오는 효와 같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6] 일본과 한국에서 거부당했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여성들도 있었다.[10] 사진 신부의 증가는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한 일본인 사진 신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대열에 합류했어요."라고 설명했다.[11]
사진 신부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에 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성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다양했다.
2. 3. 이민 정책의 변화
1907년 신사협정으로 인해 일본인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이 제한되면서, 가족 초청 형식의 사진 신부 제도가 활성화되었다.[15][16] 이 협정은 일본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중단시켰으나, 가족의 입국은 허용했다.[15] 이러한 조항은 많은 사진 신부들이 미국으로 이민할 수 있게 하였다. 신사협정의 영향은 협정 발표 전후의 남녀 인구 비율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신사협정 이전 미국으로 입국한 일본인의 86.7%가 남성이었지만, 협정 이후에는 일본인 입국자의 41.6%만이 남성이었다.[17]일본 정부는 사진 신부가 미국에서 좋지 않은 반응을 얻자, 1920년 3월 1일에 사진 신부에게 여권 발급을 중단했다.[44] 1924년 이민법으로 일본인의 미국 이민이 전면 금지되면서 사진 신부 제도도 막을 내렸다.
3. 사진 결혼의 과정
사진 신부 결혼은 중매 결혼(일본에서는 미아이 켓콘(見合い結婚), 한국에서는 중매 결혼)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2] 일본, 오키나와, 한국 여성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있는 남성들이 신부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사진을 보냈기 때문에 "사진 신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은 중매인(일본에서는 '나코도'(仲人), 한국에서는 '중매쟁이')의 도움을 받아 결혼하였다.[12]
사진 결혼은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단계 | 내용 |
---|---|
1단계 | 중매인을 통해 사진과 이력서를 교환 |
2단계 | 결혼 결정 (신랑 부재, 대리인 참석) 및 입적 |
3단계 | 도항 및 남편과의 만남 |
결혼이 정식으로 결정되면 신랑 본인이 없는 상태에서 대리인을 통해 결혼식을 올리고 입적을 마쳤다. 이후 남편의 초청으로 사증이 발급되면 다른 사진 신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 달 정도 걸리는 배 여행 후, 이민 관리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처음으로 남편을 만났다.[60]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러한 결혼을 유효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부들이 도착한 후 부두나 호텔에서 대규모 결혼식이 다시 열렸다.[11][13] 이민국에서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남편이 나타나지 않거나 신부를 보고 데려가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민국 직원이 딱하게 여겨 데려가서 나중에 결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60]
소규모이긴 하지만, 한국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사진 신부 관습이 있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1,000명의 한국 여성들이 사진 신부로 도미했다.[77] 이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77]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남성이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 여성을 사진 신부로 맞이했다는 보고도 있다.[79]
3. 1. 중매인의 역할
중매인은 신랑과 신부 양측의 정보를 수집하고, 사진과 서류를 교환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주로 일본과 하와이, 미국 본토를 오가며 활동했으며, 신랑 측으로부터 중개 수수료를 받았다.[12] 중매인들은 여성의 가족 배경, 건강, 나이, 재산을 살펴보았다.[13]사진 신부 결혼 과정은 중매 결혼(일본에서는 미아이 켓콘)과 비슷했다.[12] 사진 신부 결혼은 남성이 거의 또는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만 달랐다.[13] 신부의 이름이 남편의 가족 호적에 기재되면 일본에서 결혼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신부는 미국 여행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6]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미혼 남성은 일시 귀국하여 결혼 후 아내를 데려왔지만, 여비나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일본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의지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가족(호주)이 결혼을 결정했고, 맞선 결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중매인을 통해 사진과 이력서를 교환하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56]
3. 2. 사진 교환과 신상 정보
신랑들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재산, 직업, 학력 등의 정보를 중매인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이 정보들 중에는 허위나 과장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부들은 자신의 사진과 함께 가족 관계, 학력, 건강 상태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12] 사진 신부 결혼의 과정은 전통적인 중매 결혼(일본에서는 미아이 켓콘)을 본떴다.[12] 당시 일본에서는 결혼은 개인이 아닌 가족(주로 호주)이 결정하는 것이었고, 맞선 결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중매인을 통해 사진, 이력서 등을 교환하고 결혼을 결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면식이 없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56]3. 3. 결혼 성사 및 도항 준비
양측의 동의를 얻으면 결혼이 성사되었다. 중매 결혼(일본에서는 미아이 켓콘(見合い結婚))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신랑이 거의 또는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12][13] 신부의 이름은 남편의 가족 호적에 기재되었고,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결혼이 인정되었다.[6] 신부는 이를 통해 미국으로의 여행 서류를 받을 자격을 얻었다.[6]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유효한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아, 신부가 도착한 후 부두나 호텔에서 대규모 결혼식이 열렸다.[11][13]경제적 여유가 없는 미혼 남성은 일본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에게 의지하여 중매인을 통해 사진과 이력서를 교환하고 결혼을 결정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가족(호주)이 결혼을 결정하고 맞선 결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면식이 없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56]
사진 신부의 경우, 정식으로 결혼이 결정되면 신랑 없이 대리인을 통해 결혼식을 올리고 입적을 마쳤다. 이후 남편의 초청으로 사증이 발급되면, 다른 사진 신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도항했다. 한 달 정도 걸리는 배 여행 후, 이민 관리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처음으로 남편을 만났다. 이민국에서 며칠을 기다리거나, 남편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도 신부를 보고 데려가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민국 직원이 딱하게 여겨 신부를 데려가 나중에 결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60]
4. 사진 신부들의 삶
1907년 이후 하와이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며 결혼 문제를 겪었다. 이에 농장주들의 요청으로 사진 결혼이 이루어졌는데, 신랑이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오는 비용을 부담했다. 1910년 첫 사진결혼 신부 조사라가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와 결혼했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 여성 이민자는 10명 중 1명꼴로 남편과 함께 왔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는 6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대거 입국하여 하와이 한인 남녀 성비율을 맞추고자 했다.
사진신부 현상은 1908년 일본과 미국 간의 신사협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협정은 일본인 비자 발급을 금지했지만 가족 입국은 허용했다. 한인들도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는데, 사진신부나 사진결혼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을 교환하고, 합의하면 신부가 하와이로 와서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하와이 한인 남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신부를 맞아올 수도 있었지만,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 사진신부 제도가 더 편리했다.
사진신부 제도의 시작과 첫 사진신부에 대해서는 민찬호 목사가 1909년에 처음 소개했다는 설, 의주의 백예수가 중매했다는 설, 서울과 중부지방에서 차공삼이 보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조선 남부의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이 경상도 출신인 이유는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경상도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산업화되지 않은 조선에서 땅을 잃은 사람들은 나라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신부 제도로부터 신랑, 신부, 중매쟁이, 하와이 농장주들이 이득을 얻었다. 농장주들이 한인 총각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이 제도를 시작했다는 오해도 있지만, 농장주들이 공식적으로 권장한 증거는 없다. 1912년 하와이 농장주 조합은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의 융자 요청을 거절하며, 한인 여성들을 데려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융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사진신부 제도는 하와이 한인 남성들에게 가정생활의 희망을 제공했고, 1910년 조선의 독립이 끝난 후 한인들이 정착민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사진신부들의 특징과 동기는 하와이의 신랑 후보들과 비슷했다. 가난을 피하고 하와이의 부에 매력을 느꼈으며,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17세에서 24세 사이였고, 15세나 40세도 있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도시 출신이었고 한반도 여러 곳에서 왔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경상도에서 왔다. 사진신부들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여자는 정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사진신부들 중 5%만이 고등학교를 다녔다.
농촌을 떠나는 사진신부들은 가족의 가난 때문에, 혹은 하와이의 풍요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결심했다. 중매쟁이들은 비현실적인 풍요로움을 과장하기도 했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기독교와의 인연, 혼자 해외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이유, 전통적인 인습을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하는 이유,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한 이유, 유교적 인습에서 탈출하기 위한 이유 등 다양한 동기가 있었다.
사진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허락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유교적 전통에 따라 장손들은 부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많은 사진신부들이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사진신부 제도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은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였다. 당시 조선에서 발간된 일본어 지방 신문은 사진신부가 되는 것을 '돈에 팔려간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중매쟁이들은 사진신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거나, 사진신부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중매에서 가장 큰 비중은 사진 교환이었고, 신랑의 사진에는 속임수가 많았다. 남자들은 여자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았고, 농장 노동으로 인해 더 늙어 보였다. 또한, 흰 얼굴을 선호하는 처녀들에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은 매력적이지 않았고, 돈이 많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자들은 양복을 빌려 입거나, 남의 집이나 자동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수정하여 젊거나 덜 까맣게 보이도록 했다. 조선에 있던 여성들은 장래 남편의 속임수를 의심하기도 했다.
양쪽 다 사진을 검토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먼저 선택한 사람이 유리했다. 선택을 당한 사람은 수락하거나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에 합의하면 호적등본을 교환하고, 신랑감은 결혼준비금을 내놓아야 했다. 이 비용은 최소 100달러 이상이었고, 대부분 300~400달러에 달했다.
사진신부에게 남은 것은 여행 준비였다. 서울에서 비자를 받고 신체검사를 받은 후, 마산, 부산,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의 이민 검역소에 도착했다. 검역소에서 또 한 번의 신체검사와 영어 읽기, 쓰기 시험을 받았다.
사진신부들은 사진 한 장과 이름만 가지고 신랑들을 만나야 했다. 하와이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적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부두에서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사진신부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젊고 씩씩하고 돈도 많은 신랑감들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가난하고, 늙고, 구부정하고, 주름이 많고, 새까만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민국 건물에서 즉석 결혼식을 올렸지만, 일부는 며칠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를 한인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에서 첫날밤을 보낸 후 시내에서 쇼핑을 했다. 결혼식 후에는 한인 식당에서 피로연을 열고, 오아후 섬에서 신혼여행을 즐긴 뒤 바깥 섬으로 갔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사진신부들은 여관에서 밤낮으로 울거나,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남자들은 처녀들에게 조선으로 강제 송환할 것이라고 위협하여 결혼을 강요하기도 했다.
사진신부들이 적응해야 했던 첫 번째는 실망스러웠지만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갈 돈도 없었고, 귀국하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둘째, 새로운 생활 조건과 경제 사정에 적응해야 했다. 남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고, 중매쟁이들과 남편들이 했던 말과는 달리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숙소도 열악했고, 남편들은 신부들도 일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진신부들은 하와이에 남아 생활에 적응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와이에서의 어려운 생활이 창피해 고국의 가족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 이들은 농장에서 도시로 이사 가기를 열망했고, 1920년 오아후 섬 파업 이후 호놀룰루 근처에 정착하여 다른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새로운 생활과 노동 조건은 결혼 생활에서 남녀 평등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어떤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부양받는 것에 만족하고 일을 찾지 않기도 했다.
남편들도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신부들이 농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할 것을 알고 농장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신부들의 도착이 한인 농장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희망했던 농장주들은 실망했다. 사진신부들은 극도로 반일적이었던 한인 사회에서 살아가야 했다. 대부분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하와이로 왔기 때문에 일본어를 할 수 있었지만, 반일적이었던 남편들은 일본말 사용을 반대했다. 새로 도착한 사진신부들은 미국의 풍습과 음식에도 적응해야 했다. 사진신부들은 조선 여자답게, 조선 부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았지만, 이는 미국의 풍습과 모순되었다.
사진신부들이 어린 나이에 하와이에 왔기 때문에 서양식으로 말하고 전통적인 언어 습관을 버리기가 쉬웠다. 이들은 '님'자를 붙이거나 성에 존칭을 붙이는 전통적인 언어 사용법을 버리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갔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은 그들을 원한 남자들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 남편의 나이가 많아 부부 관계는 사랑보다는 효도에 가까웠다. 최악의 경우, 결혼은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망쳐지기도 했다. 부인은 속았다고 생각했고, 남편은 돈을 들여 데려왔는데 고마운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가정들이 젊은 신부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사진신부들의 문제는 불행한 결혼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1929년 미국의 경제 공황으로 다시 도탄에 빠지기도 했다. 남자들은 늦게 결혼하여 육체적으로 어린 처자식들을 부양하기 어려웠고, 은퇴 생활을 즐길 수도 없었다. 사진신부들은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혼자서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진신부들에게 재혼할 기회는 많았다. 여자 수보다 남자 수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진신부들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1910년과 1924년 사이에 하와이에 온 것은 한인 사회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들은 남녀 성 비율을 정상화시켰고, 2세들의 등장으로 미국화된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사진신부들은 대한 독립운동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들은 합방을 겪으면서 일본의 만행을 몸소 체험했으므로 애국심이 남편들 못지않았다. 영남부인회 같은 사진신부들의 조직은 민족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24년 미국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사진신부들의 입국은 끝나버렸다. 일본인들을 목표로 한 이민법이었지만, 조선이 일본 제국의 일부였으므로 한인들도 영향을 받았다. 하와이 한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4. 1. 기대와 현실의 괴리
많은 사진 신부들은 중매인의 말과 남편의 사진을 믿고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사진과 달랐다. 남자들은 사진을 수정하거나 오래된 사진을 보내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26] 이들은 종종 빌린 양복을 입고 실제로는 소유하지 않은 자동차나 집과 같은 사치품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27]한 사진 신부는 남편을 만난 후 "하와이에 와서 매우 놀랐고 실망했습니다... 실제로는 (사진보다) 늙어 보였습니다. 저보다 45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28] 평균적으로 신랑은 신부보다 10~15살 더 많았다.[26]
남편의 나이뿐만 아니라 열악한 생활 환경도 여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여성들은 사진 속 집과 같은 곳에서 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거칠고 고립된 농장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29] 신랑과 중매인들이 미래의 신부들에게 완전히 정직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성들이 남편과 그의 현실을 알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30]
일반적으로 중매인으로부터 남성의 가계, 재산, 교육, 건강 상태에 대한 정보를 들었지만, 이 또한 대부분 거짓이었다. 농장주라고 했지만 소작농이거나, 상인이라고 해도 초라한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이력서에 기재된 직업과 실제 직업이 다른 경우도 허다했다.[55][56]
4. 2. 언어 및 문화적 차이
사진 신부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처음 도착했을 때 이민 심사소에서 수많은 검사를 거쳐야 했다. 미국 정부는 사진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 신부들은 곧 결혼할 남편들을 처음 만나 부두에서 집단 결혼식을 치렀다.[25] 많은 여성들이 도착 후 자신이 발견한 것에 놀랐다. 여성들이 남편에 대해 알았던 대부분의 정보는 남편이 보낸 사진에 근거했으나, 사진 속 모습이 항상 남편의 실제 삶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일본과 한국에 보낸 사진을 수정하거나, 오래된 사진을 보내거나, 전혀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26] 또한, 남자들은 종종 빌린 양복을 입고, 실제로 소유하지 않은 자동차나 집과 같은 사치품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27]한 사진 신부는 남편을 만난 후, "하와이에 와서 매우 놀랐고 실망했습니다. 남편이 25살의 잘생긴 사진을 보냈는데… 그가 부두에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늙어 보였습니다. 저보다 45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습니다. 제 마음이 굳어졌어요."라며 많은 신부들의 감정을 요약했다.[28] 평균적으로 신랑은 신부보다 10~15살 더 많았다.[26] 남편의 나이만이 여성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열악한 생활 환경에 놀랐다. 많은 여성들은 남자들이 보낸 사진 속의 집과 같은 곳에서 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대신 거칠고, 고립되고, 인종적으로 분리된 농장 숙소를 발견했다.[29] 신랑과 중매인들이 미래의 신부들에게 완전히 정직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여성들이 남편과 그의 현실을 알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30]
4. 3. 경제적 어려움과 노동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농장에서 일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20년에는 농장 노동자의 14%가 여성이었고, 그 중 80%가 일본인이었다.[32] 이들은 밭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거나, 사탕수수에서 마른 잎을 제거하고 씨앗 사탕수수를 자르는 일을 했다.[33] 남성들도 비슷한 일을 했지만, 임금은 더 높았다. 1915년 일본인 여성 농장 노동자는 55센트를 받았지만, 남성들은 78센트를 받았다.[32]밭일 외에도 여성들은 요리, 청소, 바느질, 육아 등 집안일도 도맡아야 했다.[34] 육아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아이를 등에 업고 일하기도 했다.[35] 일부는 세탁, 요리, 의류 제공 등의 일로 독신 남성을 위해 밭을 떠나기도 했다.[35] 한국인 사진 신부들은 일본인 여성들보다 더 빨리 농장을 떠나 호놀룰루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36] 농장에 머물든 떠나든, 사진 신부들은 여성 단체와 교회를 통해 서로 돕는 공동체를 만들었다.[37]
사진 신부들이 외국 남성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다양했다. 당시 봉건 사회의 가족 제도, 윤리·도덕 규범에 따라 부모가 정한 결혼을 거부할 수 없었고, 효도나 부모의 뜻을 따르는 자기 희생으로 여겨졌다.[57] 또한 가난한 가정에서는 딸을 부양하기 어려워 빨리 결혼시키려 했고, 미국이 부유한 나라라고 들어 딸의 송금을 기대하기도 했다.[55] 당시 여성에게는 자활 능력이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55]
일본의 시어머니와의 불화, 혼기를 놓친 여성의 불안 외에도, 독립심이 강한 여성들은 미국이라는 문명국에 대한 호기심, 신세계의 목가적·낭만적인 생활에 대한 동경,[57]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여성 역할이나 결혼 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자유를 얻고 싶어했다.[61] 요시코 우치다의 소설 『사진 신부』의 주인공 하나는 이러한 여성을 대표한다.[62] 실제로, 노동 목적으로 이주한 남성들 중에는 교육 수준이 낮은 경우가 많았지만, 여성들은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61]
결핵과 같은 질병으로 인해 일본에서 결혼하기 어려웠던 여성들도 사진 신부를 선택했다. 카요 마타노 핫타 감독의 영화 『피쳐 브라이드』의 주인공 카요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64]
4. 4. 가정 내 불화와 갈등
일부 사진 신부들은 남편의 나이가 훨씬 많거나 성격이 맞지 않아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 남편에게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40] 이혼을 하고 일본이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지만,[26] 대부분은 사회적 편견, 경제적 어려움, 자녀 양육 등의 문제로 인해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40]몇몇 사진 신부들은 남편과 함께 살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kakeochi)를 선택하기도 했다.[42] 하지만 야반도주는 사진 신부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미국 거주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택이었다.[42][43] 일본 민법에 따라 남편이 아내의 거주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야반도주한 아내는 일본으로 추방될 수도 있었다.[44]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진 신부들은 "참음", "인내", "어쩔 수 없다"라는 일본인의 정신성을 가지고 어려움을 견뎌냈다.[52][59] 부모에 대한 효, 의리, 체면과 같은 가치관[69], 그리고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라는 책임감[56] 때문에 결혼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도 많았다.
5. 사진 신부 제도의 영향
사진 신부 제도는 1907년 이후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600명에서 1,00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이 제도를 통해 하와이로 이주했다.[1] 이 제도는 하와이 한인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 신부 제도는 신부와 신랑, 중매쟁이, 그리고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1] 일부는 농장주들이 한인 총각 노동자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이 제도를 시작했다고 오해했지만, 농장주들이 공식적으로 이 제도를 장려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가정을 이룬 남자들이 더 나은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진 신부를 환영했을 뿐이다.[1] 1912년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조합은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500달러를 융자하여 조선에서 신부감을 데려오는 제안을 받았으나, 해당 직원에 대한 신뢰성 문제와 조합의 판단으로 인해 거절했다.[1]
사진 신부 제도는 하와이 한인 남자들에게 단란한 가정을 꾸릴 희망을 제공했다.[1] 1905년 한인 이민이 중단된 지 5년 만에 시작된 이 제도는 한인들이 일시 체류자에서 정착민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10년 조선의 독립이 무너지고 같은 해에 사진 신부 제도가 시작되었으며, 조선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이 극소수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1]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었고, 경상도 지역 출신이 많았다.[1] 이들은 가난을 피하고, 기독교와 관련된 이유, 개인적인 성장 등을 위해 하와이행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부모의 반대, 사회적 편견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1] 중매쟁이들은 사진 신부 후보들에게 하와이의 풍요로운 삶을 과장하여 홍보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1]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 도착 후에도 남편과의 나이 차이, 농장 노동, 문화 및 언어 차이, 경제적 어려움 등에 적응해야 했다.[1]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한인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어린 나이에 하와이로 온 사진 신부들은 미국식 언어 습관을 쉽게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언어 사용법을 버리면서 언어적, 사회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1]
많은 사진 신부들은 불행한 결혼 생활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일부는 재혼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했다.
5. 1. 성비 불균형 해소
1907년 이후 하와이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며 결혼 문제를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진 결혼이 이루어졌는데, 신랑이 비용을 부담했다.[1] 첫 사진 신부는 조사라였으며, 1910년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와 결혼했다.[1] 사진 결혼은 가정을 이루게 했지만,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문제점이 있었다.[1]1903년에서 1905년 사이 여성 이민자는 10명 중 1명꼴이었고, 대부분 남편과 함께 왔다.[1] 결과적으로 독신 남성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했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 약 600명에서 1,000명의 사진 신부가 입국하여 하와이 한인 남녀 성비 불균형을 해소했다.[1]
사진 신부 현상은 1907년 신사협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14] 이 협정은 일본인 노동자의 비자 발급을 금지했지만, 가족의 입국은 허용했다.[15][16] 일본인 사진 신부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한인들도 이 제도를 활용했다. 사진 결혼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을 교환하고, 합의하면 신부가 하와이로 와서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하와이 한인 남성들이 귀국하여 신부를 데려올 수도 있었지만,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 사진 신부 제도가 더 편리했다.[1] 조선과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중매결혼을 했으므로, 사진 신부 제도는 장거리 결혼식이라고 할 수 있다.[1]
1924년 이민법 통과로 사진 신부 입국은 중단되었다.[24] 일본을 대상으로 한 법이었지만, 조선이 일본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한인들도 영향을 받았다. 하와이 한인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24]
사진신부 제도는 1910년에서 1924년 사이 하와이 한인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19] 남녀 성비를 정상화시켰고, 1920년대 하와이 한인 사회는 더 이상 독신 남성 중심이 아니었다. 1930년경에는 2세들의 등장으로 24세 이하 남녀 수가 거의 같아졌고, 50세 이상 집단에서는 남성이 많았다. 1930년경 대다수(54%) 한인들은 미국 시민이었고, 대부분 미국 출생이었다. 이는 2세들이 미국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속화했다.[1]
5. 2.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촉진 (한국인 사진 신부의 경우)
사진신부들은 일본 제국의 만행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남편들 못지않은 강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애국심은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한 남성은 어린 시절, 사진신부였던 어머니가 자신에게 일본인을 미워하도록 가르쳤으며, 조선인 한 명이 일본인 열 명을 당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회상한다. 조선에 가서 부모님을 방문했던 한 사진신부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77] 그녀는 1921년 하와이로 돌아오는 길에 요코하마에 정박하여 2개월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77]영남부인회와 같은 사진신부들의 단체는 조선에서 인사들을 초청하여 교회나 모임에서 연설하게 하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다. 한 여성은 조선에서 온 가수가 사진신부였던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나는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다음 세대에게 절망감이나 독립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나라를 빼앗긴 한인의 처지에 대해 매우 수치스럽고 창피하게 느끼는 듯했다. 가수가 섬을 떠난 후, 나는 교인들이 일요일마다 모여 조국 독립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외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혐오스럽고 광적인 일본인들의 행동을 저주했다. 한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본인들을 미친 사람들이라고 단정했으며, 남자들은 왜놈들을 경멸하고 욕했다. 여자들은 손을 붙잡고 울면서 고국의 상황을 한탄했다."
1924년 미국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사진신부들의 입국은 중단되었다. 이 법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조선이 일본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한인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의 한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5. 3. 미국 내 반일 감정 심화 (일본인 사진 신부의 경우)
1907년 신사협정으로 일본인 노동자의 미국 이민은 제한되었지만, 사진 신부 제도를 통해 많은 일본 여성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내 반일 감정이 심화되었다.[14][15][16] 신사협정 이전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의 86.7%가 남성이었지만, 협정 이후에는 일본인 입국자의 41.6%만이 남성이었다.[17]많은 미국인들은 신사협정이 일본의 미국 이민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진 신부의 증가는 이러한 믿음을 깨뜨리고 반일 감정을 부추겼다.[26] 이들은 사진 신부 제도를 일본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일본인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신부와 일본인 이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척주의자라고 불렸으며,[45] 이들은 사진 신부 결혼이 비문명적이며 신사협정을 위반한다고 주장했다.[5] 또한 사진 신부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미래에 부모를 위해 토지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과, 사진 신부 결혼이 매춘의 위장이라는 의혹도 제기되었다.[40][46]
6. 사진 신부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
사진 신부 제도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1907년 이후 하와이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진 결혼을 선택했다. 이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농장주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26][27]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는 약 600명에서 1,000명에 달하는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들어왔다. 이는 하와이 한인 남녀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1908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신사협정으로 인해 일본인 이민이 제한되자, 한인들이 이 제도를 활용하게 된 측면도 있었다.
사진 신부 제도의 시작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감리교의 민찬호 목사가 처음 소개했다는 설과, 의주의 백예수라는 여자가 중매를 했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진 신부들은 주로 조선 남부의 부산, 대구, 마산 등지에서 왔으며, 이는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산업화되지 않은 조선에서 땅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 신부 제도는 신랑, 신부, 중매쟁이, 그리고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농장주들은 한인 남자들이 농장에 정착하여 안정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것을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사진 신부들의 도착이 한인들의 도시 이동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와이 농장주 조합은 1912년에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융자를 제공하여 조선에서 신부감을 데려오는 것을 거절한 사례도 있었다.
사진 신부 제도는 하와이 한인 남자들에게 가정생활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한인들의 장래가 조선이 아닌 하와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가난을 피하고, 기독교와 관련된 이유로, 또는 매우 어린 나이에 하와이로 왔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었고, 무학(無學)에 가까운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의 풍요로움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에 매료되었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중매쟁이들은 비현실적인 풍요로움을 과장했고,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에서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또는 교육받고 깨인 여성들은 새로운 지평을 찾기 위해 하와이를 선택하기도 했다.
사진 신부들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것, 유교적 전통, 그리고 사진 신부 제도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 등 여러 장애물에 직면해야 했다. 중매쟁이들은 사진 신부들을 찾거나, 사진 신부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진 교환은 중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신랑들은 자신의 결점을 숨기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결혼 준비금은 최소 100달러 이상이었으며, 실제로는 300~400달러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중매쟁이들의 사기, 신부감들의 변심을 우려한 신랑들의 과시, 그리고 더 예쁜 신부감을 얻기 위한 뇌물 때문이었다.
사진 신부들은 일본 여권을 신청하고 미국 비자를 받아야 했으며, 신체검사와 영어 읽기, 쓰기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들은 사진 한 장과 이름만으로 신랑들을 만나야 했고, 많은 경우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민국 건물에서 즉석 결혼식을 올렸지만, 일부는 신부가 도착한 며칠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신부들은 새로운 생활 조건과 경제 사정에 적응해야 했으며, 특히 남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사진 신부들은 남편의 나이가 많아 아버지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결혼 생활이 망가지기도 했다. 많은 가정들이 젊은 신부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혼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먼저 시작했다.
사진 신부들의 문제는 불행한 결혼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과 남편들의 이른 사망으로 인한 과부 생활 등 다양했다. 그러나 사진 신부들은 재혼할 기회가 많았고, 하와이 한인 사회의 성 비율을 정상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에서 대한 독립운동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애국심을 생활 전반에서 표출했다. 1924년 미국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사진 신부들의 입국은 끝나버렸지만, 그들은 하와이 한인 사회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미국의 배일론자들은 사진 신부 관습이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야만적인 관습이며,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일본인 이민 여성의 높은 출산율, 장시간·저임금 노동, 그리고 일본 정부의 신사 협정 위반 등을 문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1920년에 사진 신부에 대한 여권 발급을 중단했고, 1924년의 이민법으로 인해 아시아인의 이민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6. 1. 여성의 상품화
사진 신부 제도는 여성을 상품처럼 취급하고, 결혼을 경제적 거래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46] 배척주의자들은 사진 신부 결혼이 사랑과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아 문명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5] 또한 매춘의 위장이라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다.[46]6. 2. 허위 정보와 기만
일부 남성들과 중매인들은 신부들을 유인하기 위해 허위 정보를 제공하거나 과장된 약속을 했다. 신랑들은 빌린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 오래된 사진, 심지어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26][27] 이들은 자신의 재정 상태를 과장하거나, 실제로는 소유하지 않은 집이나 자동차와 함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27]사진 신부들은 남편의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정했기 때문에, 실제 남편의 모습이나 생활 환경에 큰 실망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평균적으로 신랑은 신부보다 10~15살 더 많았고,[26] 많은 여성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열악한 농장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다.[29] 중매쟁이들 역시 하와이의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로 여성들을 유혹했다.[30]
6. 3. 인권 침해
사진 신부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강요당하거나, 가혹한 노동 조건과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등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38] 일부는 남편을 처음 본 후 거부하고 일본이나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26] 이러한 결혼의 유대감은 약해서, 신부 이영옥과 남편 정봉운은 호놀룰루에서 신혼여행을 하는 동안 다른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칭찬과 안도를 받았다.[39] 일부 남편은 알코올 중독, 신체적 학대, 심지어 매춘굴에 팔려고 했지만, 많은 여성들은 아이들을 위해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40]남편에게 학대받았지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사진 신부의 예는 시즈코 타마키였다. 그녀는 남편과 5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41] 처음 결혼했지만 남편과 함께 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kakeochi'')를 선택했다.[42] 야반도주는 사진 신부의 평판과 미국 내 거주를 위협했기 때문에 위험했다.[42][43] 야반도주한 아내는 남편에게 아내의 새로운 거주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일본 민법에 따라 일본으로 추방될 수 있었다. 그러한 여성들을 위해, 미국의 여성 가정 선교 협회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임시 숙소를 제공했다.[44]
사진 신부가 외국에 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성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다양했다. 먼저, 당시 봉건 사회의 가족 제도, 윤리·도덕 규범과 가치 기준이 있었다. 부모가 정한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으며, 효도나 부모의 희망에 따르는 자기 희생으로 여겨졌다.[57] 또한, 경제적인 이유로 가난한 가정에서는 딸을 부양할 수 없었고, 자녀가 많은 가정에서는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미국은 부유한 나라라고 들었기에 딸의 송금을 기대하며 가능한 한 빨리 결혼시키려 했다. 당시 여성에게는 자활 능력이 없었다.[55] 더 나아가, 일본의 시어머니와의 불화, 혼기를 놓친 여성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이유에서, 독립심이 강한 여성은 미국이라는 문명국에 대한 호기심, 신세계의 목가적·낭만적인 생활에 대한 동경[57],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이나 결혼 제도에 위화감을 느껴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다는 마음[61]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7. 사진 신부 제도와 관련된 문화 작품
사진 신부 제도는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 앨런 브레너트의 소설 《호놀룰루》(2009)는 하와이로 오는 한국 사진 신부를 다루고 있다.
- 줄리 오츠카의 소설 《다락방의 부처》(2011)는 약 100년 전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온 사진 신부들의 삶과 불확실한 시대에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묘사한다. 이 소설은 2011년 전국 도서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13년 더블린 임팩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 AMC TV 시리즈 ''테러: 인페미''(2019)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유코가 죽어 유레이로 돌아오기 전에 사진 신부였으며, 이로 인해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보여준다.
- 로리 마츠카와가 쓰고 태미 예가 그림을 그린 2023년 어린이책 "용감한 사토 부인"에서는 일본에서 하와이로 이민 와 어린 소녀와 우정을 쌓고 일본의 유산과 사진 신부로서의 경험에 대해 가르쳐 준 사진 신부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베이비시터와 함께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7. 1. 요시코 우치다의 소설 "사진 신부" (Picture Bride)
요시코 우치다의 소설 《사진 신부》(1987)는 1917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보내진 가상의 일본 여성 하나 오미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1] 이 소설은 1943년 일본 강제 수용소에서의 그녀의 경험도 다루고 있다.[1]7. 2. 카요 핫타 감독의 영화 "사진 신부" (Picture Bride)
하와이 출신 감독 가요 핫타가 제작하고 쿠도 유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사진 신부''(1994)는 사진 교환을 통해 농장 노동자와 하와이로 가게 된 일본 여성 리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7. 3. 박남수 편저 "사진 신부"
박남수가 엮은 한국어 책 《사진 신부》(2003)는 사진 신부 현상에 대한 역사적 개요와 다양한 한국/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쓴 관련 시, 단편 소설, 에세이, 비평적 에세이를 엮어 한국/한국계 미국 문화적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이 책은 1903년 RMS Gaelic|RMS 게일릭영어호에 탑승하여 미국 영토에 한국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엮어졌다.8. 결론
1907년 이후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진 결혼을 선택했다.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오는 비용은 신랑이 부담했으며, 1910년 첫 사진 신부가 하와이 노동자와 결혼했다. 이 제도는 노동자들이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했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 여성 이민자는 10명 중 1명꼴로 매우 적었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 약 600명에서 1,000명의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들어오면서 한인 남녀 성비 불균형을 কিছুটা 해소했다.
사진 신부 현상은 1908년 일본과 미국 간의 신사협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협정은 일본인 비자 발급을 제한했지만, 가족의 입국은 허용했다. 일본인 사진 신부들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한인들도 이 제도를 활용하게 되었다. 사진 결혼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을 교환하고,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부가 하와이로 와서 결혼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귀국 결혼보다 편리한 대안이었다.
사진 신부 제도의 시작과 첫 사진 신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민찬호 목사가 1909년에 처음 소개했다는 설, 백예수라는 여자가 중매했다는 설, 차공삼이라는 사람이 신부 사진을 보냈다는 설 등이 있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진 신부들은 조선 남부의 항구 도시인 부산, 대구, 마산 출신이었다.
사진 신부 제도는 신랑, 신부, 중매쟁이,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농장주들은 한인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기대했지만, 사진 신부들의 도착은 오히려 한인들의 도시 이주를 가속화시켰다. 하와이 농장주 조합은 1912년 한인 직업소개소 직원을 통해 한인 신부들을 데려오는 제안을 받았으나, 해당 직원에 대한 신뢰 문제로 거절했다.
사진 신부 제도는 하와이 한인 남성들에게 가정생활의 희망을 제공했고, 한인들의 정착을 도왔다. 1910년 조선의 독립이 좌절되고 사진 신부 제도가 시작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은 극소수였다.
사진 신부들은 가난을 피하고, 기독교와 관련을 맺거나, 젊은 나이에 해외로 갈 기회를 얻기 위해 하와이로 왔다. 그러나 남자들과 달리 대부분 농촌 출신이었고, 교육 수준이 낮았다.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대를 품고 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매쟁이들은 과장된 말로 사진 신부들을 유혹했고, 많은 여성들이 실망했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기독교와의 인연, 일본 지배 탈출,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 등이 사진 신부가 된 동기였다.
사진 신부들은 부모님의 반대, 유교적 전통, 가문의 명예 문제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중매쟁이들은 사진 신부 제도의 핵심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신부를 찾거나, 가족을 설득하기도 했다.
사진 교환 과정에서 속임수가 많았다. 남자들은 나이가 많고, 농장 노동으로 늙어 보였으며, 가난했다. 이를 숨기기 위해 양복을 빌려 입거나, 사진을 조작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신랑의 사진에 대해 의심했지만, 선택권은 제한적이었다.
결혼 합의 후, 신랑은 결혼 준비금과 여비를 지불해야 했다. 이 비용은 중매쟁이의 사기, 신부의 변심 우려, 더 나은 신부를 얻기 위한 뇌물 등으로 인해 상당히 높았다.
사진 신부들은 일본 여권을 신청하고, 미국 비자를 받아 여행 준비를 했다. 요코하마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호놀룰루 이민 검역소에서 영어 시험을 치렀다.
사진 신부들은 사진으로만 본 신랑을 만나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 차이가 크고, 외모가 사진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민국 건물에서 즉석 결혼식을 올렸지만, 일부는 며칠 후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신부들은 새로운 생활 조건, 경제 사정, 남편과의 관계, 미국의 풍습 등에 적응해야 했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 생활에 불만을 느꼈고, 이혼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와이에는 노총각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성들이 한인 사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진 신부들은 어린 나이에 하와이로 왔기 때문에 서양식 언어 습관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는 조선의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과 달리 부부간의 언어적, 사회적 평등을 가져왔다.
많은 가정들이 젊은 신부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여성들은 미국의 자유와 개인의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이혼은 불행한 결혼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진 신부들의 결혼 생활은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작되었고, 1929년 미국의 경제 공황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남자들은 늦은 결혼으로 인해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없었고, 사진 신부들은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진 신부들은 재혼 기회가 많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과 1924년 사이 하와이로 온 사진 신부들은 한인 사회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들은 남녀 성비를 정상화시켰고, 2세들의 등장으로 미국 가치관 수용을 가속화시켰다.
사진 신부들은 대한 독립운동을 크게 진작시켰다. 그들은 일본의 만행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애국심이 강했고, 영남부인회와 같은 조직을 통해 민족 운동을 벌였다.
1924년 미국 이민법 통과로 사진 신부들의 입국은 중단되었다. 이 법은 일본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조선이 일본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한인들도 영향을 받았다. 하와이 한인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참조
[1]
서적
Pau Hana: Plantation Life and Labor in Hawaii, 1835-1920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Prostitutes and Picture Brides: Chinese and Japanese Immigration, Settlement, and American Nation-Building, 1870-1920
Center for Comparative Immigration Studies
[3]
문서
Ogawa
[4]
서적
Pau Hana: Plantation Life and Labor in Hawaii, 1835-1920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Hawaii press
[5]
간행물
Asian women in Hawai'i: migration, family, work, and identity
[6]
문서
Fan
[7]
학술지
Korean Women of America: From Subjugation to Partnership, 1903-1930
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1984
[8]
문서
Fan
[9]
학술지
Korean Women of America: From Subjugation to Partnership, 1903-1930
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1984
[10]
문서
Chai
[11]
문서
KVIE Public Television
[12]
문서
Chai
[13]
문서
Niiya
[14]
문서
Lee
[15]
문서
Fan
[16]
서적
Korean Americans: A Concise History
The 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17]
문서
Lee
[18]
웹사이트
The Japanese in Hawai'i: 1885-1920
http://www.picturebr[...]
2012-11-05
[19]
문서
Takaki
[20]
학술지
Unwanted Allies: Koreans as Enemy Aliens in World War II
1985-11
[21]
학술지
Koreans in America, 1903-1945
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1975-04
[22]
학술지
Korean Women of America: From Subordination to Partnership, 1903-1930
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1984
[23]
서적
Korean Americans: A Concise History
The 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24]
문서
Tanaka
[25]
웹사이트
Japanese Picture Brides
http://www.fofweb.co[...]
Facts On File, Inc.
2012-11-05
[26]
문서
Niiya
[27]
문서
Choi
[28]
문서
Chai
[29]
문서
Ogawa
[30]
문서
Chai
[31]
문서
Ogawa
[32]
문서
Takaki
[33]
문서
Bill
[34]
문서
Bill
[35]
문서
Bill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Korean Americans: A Concise History
The Young Oak Kim Center for Korean American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40]
서적
[41]
뉴스
Japanese Picture Brides Recall Hardships of American Life
https://www.latimes.[...]
Los Angeles Times
1995-05-11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웹사이트
2011 National Book Awards, The National Book Foundation
https://www.national[...]
2018-05-24
[49]
뉴스
https://nwasianweekl[...]
2024-08
[50]
서적
アジア系アメリカ文学 ― 記憶と創造
大阪教育図書
[51]
웹사이트
明治天皇に献上されるはずだった?ハワイに渡った日本人移民の油絵
https://www.swissinf[...]
2018-04-23
[52]
웹사이트
Picture Bride - The Japanese in Hawai'i: 1885-1920
https://caamedia.org[...]
CAAM - 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
[53]
웹사이트
日米紳士協約
https://kotobank.jp/[...]
[54]
간행물
Preserving Racial Identity: Population Patterns and the Application of Anti-Miscegenation Statutes to Asian Americans, 1910-1950
https://doi.org/10.1[...]
[55]
웹사이트
Picture brides
http://encyclopedia.[...]
Densho Encyclopedia
[56]
서적
もう一つの日米関係史 ― 紛争と協調のなかの日系アメリカ人
有斐閣
[57]
서적
Japanese American Women: Three Generations 1890-1990
Mina Press Publishing, Nat'l Japanese American Historical Society
[58]
웹사이트
Immigration: The Picture Bride Era
http://www.discovern[...]
Discover Nikkei
[59]
웹사이트
Japanese Picture Brides Recall Hardships of American Life
https://www.latimes.[...]
1995-05-11
[60]
웹사이트
Picture Bride - Woven Tales: Early Japanese Immigrant Clothing in Hawai'i
https://caamedia.org[...]
CAAM - 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
[61]
간행물
「写真花嫁」と『写真花嫁』 : 事実と虚構の間で
http://id.nii.ac.jp/[...]
山形大学
[62]
서적
写真花嫁
學藝書林
[63]
웹사이트
Yoshiko Uchida
http://encyclopedia.[...]
Densho Encyclopedia
[64]
웹사이트
20th anniversary screenings of ‘Picture Bride’ honor pioneering Issei » Nichi Bei
https://www.nichibei[...]
Nichi Bei Foundation
[65]
서적
ヒサエ・ヤマモト作品集 ―「十七文字」ほか十八編
南雲堂フェニックス
[66]
서적
Songs My Mother Taught Me: Stories, Plays, and Memoir
The Feminist Press at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67]
웹사이트
Meet the 96-Year-Old Author Sharing the Untold Stories of Japanese Picture Brides
http://www.honolulum[...]
Honolulu-Magazine
2017-12-13
[68]
웹사이트
Japanese Picture Brides: Building a Family through Photographs
https://www.kcet.org[...]
2012-07-31
[69]
웹사이트
'Picture Bride Stories': Stories of the resilient women who traded Japan for the cane fields of Hawaii
https://www.japantim[...]
2017-01-21
[70]
서적
Issei Women: Echoes from Another Frontier
Pacific Book Publishing
[71]
웹사이트
バーバラ・カワカミ - 日本人移民の衣服専門家・研究者
http://www.discovern[...]
Discover Nikkei
2019-08-12
[72]
웹사이트
Barbara Kawakami Collection
http://www.janm.org/[...]
Japanese American National Museum
2019-08-12
[73]
웹사이트
Picture Bride (DVD)
https://janmstore.co[...]
2019-08-12
[74]
웹사이트
Q & A with KAYO HATTA : The Protector of the 'Picture Bride's' Stories
https://www.latimes.[...]
2019-08-12
[75]
서적
Picture Bride Stories
Latitude 20
2016
[76]
간행물
海を渡る花嫁への一考察(1) : バーバラ・川上によるピクチャー・ブライド・ストーリーズを通して
https://hdl.handle.n[...]
京都女子大学現代社会学部
2019-01-31
[77]
웹사이트
Korean picture brides of 20th century
http://www.koreahera[...]
The Korea Herald
2019-08-12
[78]
간행물
"Mrs. K.": Oral History of a Korean Picture Bride
https://academicwork[...]
1979-01-01
[79]
웹사이트
Post-1915, Picture-Brides Gave Armenians Fresh Start in US
https://eurasianet.o[...]
Eurasianet
2015-04-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